똥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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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변소는 대소변을 구덩이에 그대로 가둬두었다가 양이 차면 퍼내야 하는 소위 푸세식이다. 양이 충분히 쌓이고 거름으로 쓸만큼 적절히 삭으면 푸어야 한다. 이를 '변소 친다'라고 한다. 우리집에는 나란히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거름으로 잘 삭히기 위해 교대로 썼던 듯하다. 

경상도에서 변소를 '통시'라 불렀다. '통시'는 변소나 화장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변소'는 뒷간 전체의 공간적 개념이 강하다면, '통시'는 똥통 구덩이의 의미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변소에 빠졌다'라는 말보다 '통시에 빠졌다'라는 말을 더 쉽게 썼으니까. 

어릴 때 변소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통시' 위에 평행하게 걸쳐둔 판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하는데, 애들에게는 아래의 깊고 넓은 구덩이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기다 큰 아이들이 들려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와 같은 이야기까지 생각나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통시에 앉아야 할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생각나서 아래에서 종이 든 손이 올라오는 상상이 떠오른다. 그 통시에 가끔 구데기를 쫒던 닭이 빠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죽은 닭은 요리가 되어 밥상에 올라왔었다. 드물지만 아이들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백설기를 해서 돌린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놀란 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매우 효과적인 심리 요법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빠져 본적은 없는데 앞집 애가 가끔 빠졌다. 떡을 보면 '니 통시 빠졌재?'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가끔은 '떡 좀 먹고 싶다'라고 하며 놀리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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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다양한 교육 방법 중에 너무도 가혹하고 비가역적인 징계가 있었다. 내가 힘들게 모은 귀한 재산을 '통시'에 갖다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 내 재산이라고 해봐야 딱지나 구슬이고, 어떤 땐 빌려온 만화책이 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따먹기'를 잘했다. 한 번은 동네 아이들에게서 따온 종이로 접은 딱지가 비료 푸대로 두어 자루나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엄마는 그 모두를 통시에 갖다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때 경험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아는 사람을 알 것이다. 잘 뒤집어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갖도록 딱지를 정성스레 만드는 과정과 따먹기하는 동안의 그 혼신의 집중력과 인고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었다면, 엄마로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뒤에 또 한번 천붕지통(天崩之痛)경험하였다. 이제는 구슬이었다. 죽기살기로 따모아서 소머리 분유 깡통에 몇 통을 채웠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뒷뜰에다 용의주도하게 파뭍어두었는데, 그게 어떻게 들통이 난 것이다. 학교에 갔다오니 빈 깡통만 마당에 나동그라져 있고 구슬들은 통시 속에서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구슬들을 모으기까지의 노력을 생각하니 저 귀한 것들을 그냥 저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똥바가지로 들어내고 푸대에 담아 개울로 가져갔다. 헹구고 씻고 말려서 다시 썼다.

친구에게서 빌려온 만화책을 통시에 빠트렸을 때의 절망감과 그 뒤의 시련은 필설로 다 설명 못할 정도이다. 만화방에서 빌려온 것이니 책값을 돈으로 갚아야 한다. 그게 얼마였던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그 돈을 갚기 위해 나는 상당 기간을 처절하게 노력하여야 했다. 비닐하우스 철거할 때 나오는 폐비닐을 모아 고물상에 팔기도 하고, 뒷마당서 굴껍질(우리집은 조개무지와 가까워 땅을 파면 굴껍질이 많아 나왔다)을 캐서 양계장에 갖다 팔았다. 가끔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 삥땅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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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집을 새로 지었다. 그 전의 초가집을 헐고 슬라브 구조의 양옥집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새 집에서는 집 본채에 화장실이 있기를 희망헀다. 부산의 친구집에서 본 수세식 화장실이 무척 부러웠다. 아버지에게 강하게 요청을 하고 건축업자도 설계에서 그런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집으로 화장실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여전히 재래식으로 다만 좀더 깔끔해진 구조로 지어졌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밥 먹는 곳 가까이에 변소가 있는 그런 불결한 구조를 허용할 수 없고, 아까운 거름을 하수구에 내버리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셨다.
화장실이 승격되어 본채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된 때는 결혼 10주년쯤 되었을 때 새 집을 지으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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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시를 칠 때에는 곰삭은 거름을 똥장군에 퍼담는다. 그러고는 자전거나 수레에 싣고 논과 밭으로 실어 날라야 한다. 고등학교 때 쯤부터 그 똥장군 나르기 작업은 나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는 굳이 그 곤란한 일을 다른 일꾼들 제쳐놓고 내게 맡기셨다. 이송 수단은 주로 짐자전거였다. 

똥장군은 와인발효용 오크통과 구조가 비슷하다. 내부의 공간을 두고 나무판재를 통형상으로 둘러가며 치밀하게 짜맞추고 대나무 테두리로 견고히 둘러 고정한 구조이다. 나무판재들 사이의 틈새는 아교로 때운다. 아무래도 오래 쓰면 틈새가 벌어져 조금씩 새기도 하고, 많이 낡으면 길이방향의 양단을 막고 있는 마감 판재마저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 똥장군을 나르는 일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나다니며 냄새로 동네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미안함이 있으니 신속히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그러니 새 신부가 시댁의 신주를 모시듯 조심하면서 빨리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내용물은 액체가 아닌가. 무게도 상당하다. 잘은 몰라도 40~50kg은 족히 나가지 싶다. 워낙 조심해서 다녀서인지, 먹을 것을 싣고 다니다 엎어본 적은 있어도 똥장군을 엎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똥장군은 정말 더러운 것이기에 오히려 진정으로 신주 모시듯 귀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가 그 위태로운 일을 굳이 내게 시키셨던 깊은 뜻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살아 오면서 그런 경험을 적잖이 했다. 똥장군과 같은 사람, 똥장군과 같은 일거리..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일일수록 혼신의 정성을 다하여야 더 큰 후회꺼리를 만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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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장군 나르기의 정작 곤란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건 사람들의 관심이다. 똥장군에서 나는 냄새와 불결함은 내가 구경꺼리가 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논으로 가려면 동네 웃깍단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그게 동네 사람들에게는 희안한 볼꺼리였다. 그 중에는 똥장군 나르는 내 모습을 가급적이면 보이고 싶지 않을 여학생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당시에 나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그 귀한 대학생이 똥장군을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게 구경꺼리가 될만도 했지 싶다. 동네 아지매들은 나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외동 양반 참말로 얄궂고 별나시재. 우째 저 귀한 아들을 세상에 저런 일을 시키실까?. 일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판검사 되시면 나중에 똥장군 판검사라 놀림 당할낀데' 등등..

아버지는 왜 똥장군 나르기를 내게 맡기셨을까. 물론 농가에서는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 누구든지 걸리는 대로 일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게 농가 가장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똥장군이다. 집에는 항상 일을 도와주러오는 일꾼들이 몇 있었으니 그들에게 시킬 수 있었을 거다. 그러면 한창 때의 아들 체면이 좀 덜 망가졌을텐데.

가만히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응당 그러실 만도 하다. 아버지는 일꾼들과 함께 일을 해도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남을 시키지 않고 직접 하셨다. 심지어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집 울타리 나무의 가지를 칠 때, 불러온 일꾼들은 아래에 떨어진 가치를 치우는 일을 하게 하고 손수 나무 위에 올라가셔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셨다. 내가 보고 기겁을 해서 교대하긴 하셨지만, 위험하거나 더러운 일은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시다. 똥장군 나르기도 그 일이 워낙 궃은 일이고, 일꾼들도 동네에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으니, 그들도 동네 한복판을 다닐 때 나름의 체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남이 아닌 아들이 똥장군을 다루는 게 너무도 지당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가 나의 얄팍한 재주를 가벼이 자랑하고 대학생입네하고 거들먹대며 조금씩 교만해지는 모습이 아버지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라고 항상 가르치셨다. 나의 경박한 교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명백히 반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머리 꼭지로 올라가는 나의 교만을 어떻게든 제대로 다잡아 경계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똥장군으로 교만을 억눌러주셨고, 그 덕분에 세월이 상당히 지나고 나서도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남달리 기특한 대학생 청년이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끝)



##  덧붙임말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논두렁이나 잔디밭에서 다른 풀에 비해 눈에 드러나게 자란 풀은 필시 잘려나가기 마련이다. 사람도 제가 똑똑하다고 교만하여 남의 눈에 드러나면 시기를 받아서나 조직의 건강을 위해 그것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
    원래는 '범을 청치 말고 갓을 짓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릴 땐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좀 자라서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갓'은 작은 산 혹은 숲을 의미한다. 범(호랑이)은 오라고 청한다고 해서 오는 동물이 아니다. 숲이 짙으면 작은 동물과 큰 동물이 모이게 되고, 그러면 범은 먹이가 있는 그 숲으로 저절로 오게 되어있다. 그러니 내가 나의 숲 즉 덕을 충분히 쌓으면 사람들은 내가 굳이 오라고 청하지 않더라도 내게 몰려든다는 가르침이다. 도리불언 하자성혜(蹊, 복숭아와 자두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길이 저절로 난다)와 같은 의미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