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블루, IT 넘어 GT 시장까지 넘본다

‘유쾌한 돼지’ 팔미사노 회장의 끝없는 식욕

강남규 | 제106호 | 20090322 입력 블로그 바로가기
IBM 최고경영자(CEO) 새뮤얼 팔미사노(57)회장의 별명은 ‘유쾌한 돼지’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미소가 퍼지면 한없이 너그러워 보인다. 그는 신경질적인 스티브 잡스 애플 CEO나 기민하고 재기 넘쳐 보이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전 회장, 날카로우면서 단호한 인상인 앤디 그로브 전 인텔 CEO 등과는 다른 세계 사람으로 비친다. 팔미사노의 능력이나 카리스마도 이들에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IBM의 지위나 명성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CEO라는 평가까지 나돌기도 했다.

이런 그가 요즘 저돌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공격적으로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다. 18일 그는 서버 제작업체인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이하 썬마이크로)와 합병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순간 글로벌 IT 업계가 요동했다. 대형 컴퓨터와 저장장치 등 하드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소프트웨어 개발과 IT 컨설팅 시장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IBM이 경제위기 와중에 공격적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연간 500억 달러 규모인 서버 시장에서 확실하게 1위를 굳힐 전망이다. 현재 두 회사의 시장 점유율만 합해도 42% 수준이다. 이는 2위 업체인 휼렛패커드보다 10%포인트 높은 것이다. 합병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면 시장 점유율 차이는 더욱 커질 수 있다.

두 회사의 합병은 IT 세계에서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MS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두 회사가 단순히 하드웨어인 서버 시장만을 노려 합병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썬마이크로는 자바(Java)라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IBM은 합병으로 이 기술을 통째로 넘겨받아 MS에 대항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도 있다.

특히 IBM과 썬마이크로는 사실상 MS에 대항해 등장한 리눅스 시스템을 지지하는 쪽이다. 두 회사가 한 몸이 돼 세계 서버 시장을 장악하면 서버 운용 시스템으로 리눅스 제품을 적극적으로 마케팅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IBM은 썬마이크로의 자산·부채를 실사하는 단계다. 썬마이크로가 보유한 각종 기술과 특허 등이 알려진 만큼 수익을 내고 있는지 따져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이 일단락되면 다음 주 중으로 가격 흥정에 들어간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인수가격이 68억~80억 달러 정도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썬마이크로의 지난 주말 시가총액은 60억3000만 달러였다.

두 회사 결합이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견제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다. 미 시스코시스템스가 두 회사 합병 추진이 알려지기 직전 서버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시스코는 IT업계에서 가장 현찰을 많이 움켜쥐고 있는 회사로 꼽힌다. 지난해 말 기준 30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 IBM은 그 절반 수준이다. 두 회사가 썬마이크로를 두고 격돌한다면 자금력 면에서 시스코가 우위다. 이 사실 자체가 썬마이크로 경영진의 콧대를 높여줄 가능성이 크다. 사려는 쪽이 하나 더 있다는 점을 믿고 가격을 최대한 높이려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독점 논란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서버의 경우 두 회사의 현재 점유율만 합해도 시장 점유율이 절반에 가깝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반독점 문제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아 두 회사의 합병에 제동을 걸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월스트리트는 반독점 논란 때문에 결합이 어렵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팔미사노는 이렇게 M&A로 몸집을 불리면서 아주 새로운 비즈니스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15일엔 이른바 ‘스마트 워터(Smart Water)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간단히 말해 첨단 정수사업이다. 하이테크 필터 등 정수 장비에 IT 네트워크 기술을 융합해 최상의 물 관리 솔루션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는 5년 안에 정수 사업이 500억 달러대 시장으로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팔미사노가 야심차게 추진한 ‘빅 그린 이노베이션스’의 일부다.

팔미사노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미국 실리콘밸리 주변에서는 “유쾌한 돼지가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놓고 측면을 강하게 공격하고 있는 양상”이라는 촌평이 나오고 있다(19일자 월스트리트 저널). 성동격서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제야 전임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평가가 좀 더 정확해 보인다.

그는 2002년 루이스 거스트너의 뒤를 이어 ‘빅 블루’라 불리는 IBM의 CEO가 됐다. 여러면에서 그는 거스트너와 다른 인물이다. 거스트너는 월스트리트에서 M&A 플레이를 펼치며 잔뼈가 굵었다. 반면 팔미사노는 1973년 이후 IBM 내부에서 성장했다. 거스트너가 굴러온 돌이라면 팔미사노는 박힌 돌인 셈이다.

거스트너는 93년 IBM 경영권을 거머쥔 이후 철저하게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부정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IBM을 대형 컴퓨터를 제조하는 업체에서 IT 지식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이 작업을 ‘코끼리(IBM)를 춤추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팔미사노는 개혁을 추진하는 거스트너 밑에서 일상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운영책임자(COO)였다.

IBM 이사회는 9년간 외과 수술하듯 조직의 체질을 뜯어고쳐온 거스트너를 2002년 팔미사노로 교체했다. 이는 장기간 개혁 피로를 달래기 위한 조처로 풀이됐다. 전문가들은 GE의 잭 웰치-제프리 이멜트 사이에 이뤄진 경영권 승계와 비슷하다고 평했다. 팔미사노는 이후 조직 안정에 힘을 쏟으며 자기 스타일의 전략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제 색깔을 드러내며 공격적으로 확장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전임자 거스트너의 축소 지향적이며 내부 개혁적인 전략과는 정반대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