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習_아테나이칼럼'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8.11.13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오훼(烏喙)는 먹지 마라
  2. 2018.10.21 모호함의 미학 (2)
  3. 2018.09.02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
  4. 2018.09.02 아버지의 여행 소동
  5. 2018.08.11 똥장군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오훼(烏喙)는 먹지 마라!

이불식오훼(飢而不食烏喙)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오훼(烏喙)를 먹어서는 안된다.
그것으로 배를 채우면 채울수록
굶어죽는 것과 다름 없는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飢而不食烏喙者爲其愈充腹 而與餓死同患也)
列國志


**
오훼(
烏喙)는 '까마귀 부리'라는 뜻으로, 까마귀의 부리나 머리처럼 생긴 
오두() 혹은 초오(烏)라는 식물의 뿌리를 가리킨다. 요동()의 변방에서 이것의 즙을 사냥에 쓰기도 하는 일종의 독약이기도 하고, 두통, 반신불수, 구안와사 등의 치료에 쓰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오훼(烏喙)'라는 단어는 사람의 관상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처럼 튀어나온 사람을 '장경오훼(長頸烏喙)형 인간'이라고 한다. 만화 캐릭터 심슨(Simpson)의 모습이 연상된다. 사기(史記)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서 범려(蠡)는, 장경오훼형 인간은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
아무리 배가 고파도 결코 먹어서는 안되는 오훼(烏喙)에는 '씨앗' 즉 종자(種子)가 있다. 

씨앗은 굶주린 사람에게 잠깐의 허기를 모면하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굶주림의 시간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더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절망의 고통은 더 클 것이다. 

종자란 ‘생명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길'(生生之道 _ 燕巖集)이니, 그것은 곧 생명이고 희망인 것이다.

씨앗을 먹어버리는 것은 희망과 생명의 영속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절망은 언젠가 그 끝이 있지만,
우리가 언제까지나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것은 희망이다.


**
또 다른
오훼(烏喙)는 사람들의 '믿음'을 잃는 것이다.

기업이 정말 힘들어졌을 때, 경영자들은 다양한 뒷모습을 보여준다. 대체로 초라하거나 안타까운 모습이겠지만, 그 중 가장 딱한 것이 주변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은 사업의 몰락이라는 큰 아픔에다 세인의 비난이라는 오명까지 더 얹어 떠나는 것이다.
마지막 정리 단계에서 정말 먹어서는 안되는 '믿음 상실'이라는 오훼를 삼킨 셈이다. 그렇게 해버리고 떠나면 세월이 지나 형편이 나아져 다시 일어나고 싶어도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공자께서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군대, 식량 및 믿음(足食足兵民信)이라고 하면서, 이들 중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였다. 남의 침략을 당하고 배를 굶주리더라도 백성들의 믿음이 남아 있다면 나라가 유지되거나 되찾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백성의 믿음'은 경영자에게는 함께 비즈니스에 관계했던 직원, 거래처, 고객 등 모든 사람들의 신뢰일 것이다.

<일본 고이즈미 전 총리의 글.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없이 존립할 수 없다)>


**
배고플 때 '믿음 상실'이라는 오훼를 삼킨 사람은 그 '뒷모습'이 가장 추한 사람이다. 경영자들 중에는 자신의 회사를 부도처리하면서 자신의 재산은 미리 요령 좋게 다 빼돌려놓고 그를 믿고 거래하거나 함께 일해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눈물나게 하여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 있다.  

나태주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뒷모습]

                                   _ 나태주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게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모호함의 미학


..
내가 변리사로서 첫 실무를 시작했던 그 사무소의 대표 변리사는 군산 출신이셨다. 그 지방 출신답게 불특정 대명사인 '거시기'라는 말을 자주 쓰셨다. 가끔 내 자리에 어슬렁어슬렁 오셔서는 뜬금없이, '허변, 거시기 그거.. 거시기 하고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처음에는 질문하시는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어느 사건 말씀인가요?'라고 되묻기도 하고, 어떤 땐 최근에 함께 협의하였던 사건에 대해 물어보시는 거라 여기고 그 사건의 진행 상황에 대해 상세히 보고드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좀 지나고 보니 그 질문의 본래 의미가 그저 '별 일 없지?' 혹은 '열심히 하고 있는가?' 정도의 인사말에 물과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좀 익숙해진 후에는 대화가 매우 순조로워졌다.

"허변, 거시기 그거.. 거시기 하고 있는가?"
"예. 거시기는.. 별 거시기 없습니다."

이런 희안한 우리 대화를 듣는 주변의 팀원들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영화 '황산벌'에서 이문식의 '기시기' 관련 코메디 연기는 압권이었다. 신라의 첨자가 염탐해온 백제군들의 대화는 모두 거시기로 시작해서 거시기로 끝나니, 제대로 염탐은 했으되 아무 것도 알게 된 게 없었다. 

'거시기'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 모호함이 참 좋다. 그 모호함 속에는 항상 명확한 메시지가 있다. 단순한 말문을 트는 인사이거나, 정서적 공감에 대한 확인이거나, 난감한 구체적인 상황을 우회하기 위해서이거나..


**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적잖은 농사를 각각 지으셨다. 항상 여러 일꾼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두 분의 일꾼 다루는 방식이 판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방식에 불만이 많으셨고, 항상 작은아버지의 방식을 부러워하셨다.

아버지는 성격이 곰꼼하신 분이라, 어떤 일이든 나름의 표준을 정하고 그것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하여 빈틈없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분이었다. 비닐 하우스를 지을 때에도 재료를 정확히 재단하여 제자리에 어김없이 적용되도록 하셨고, 종이나 노끈 하나를 자르더라도 허투루 남거나 행여 모자라지 않아야 한다. 훌륭한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이라 할 수 있다. 가끔 너무 여유없이 설계를 했다가 아까운 비닐 등 재료를 통째로 못쓰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성정을 가진 분이시니, 일꾼들을 다룰 때에도 그랬다. 까다로운 당신의 방식을 사전에 세세히 전수하였고, 그들이 하는 일을 일일이 확인하셔야 직성이 풀리셨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도 주인의 지적을 염두에 두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신경 씀이 일하는 맛을 떨어뜨렸을 것이고 일의 효율에도 보탬이 될 리가 없었다. 특히나 곁에서 수발하는 어머니에게는 융통성 없는 숨막힘이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작은아버지는 아버지보다 대범하고 거친 편이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일 재주가 무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잘 가르치지도 못하셨다. 그저 총괄적인 목표만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부분은 막연히 일꾼들에게 맡겼다. 목표가 주어지면 일꾼들은 그 일을 효율적으로 끝내기 위해 스스로 일을 할당하고 일하는 방식도 스스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면 이제 그 일은 자신들의 것이었다. 스스로 일을 설계하고 시작하니, 충만한 성취동기를 가지고 즐겁고 효율적으로 일에 임하였을 것이다. 지시의 모호함은 자발성을 유발시키고, 자발성은 동기 부여와 성취의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어릴 때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일을 하면 어쩐지 즐겁지가 않았다. 시시콜콜 시키는 대로만 하여야 하고, 시킨 대로 하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내 나름의 요령을 부렸다가는 호통이 떨어진다. 내가 일을 하면서도 내 일을 한다는 성취감이 없으니 일의 재미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한 일이 잘 마무리 되면 그건 아버지가 시킨대로 한 결과이니 칭찬받을 이유도 없다. 아버지와의 일의 결과는 당연한 결과이거나 잘못을 지적당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어릴 때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세심함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특히 복잡한 상황이나 민감한 기계장치에 관련하는 일에서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미묘한 사람의 심리를 고려한 세심함이 필요한 때가 있는가 하면, 디테일을 완전히 배제하고 큰 그림만을 가지고 모호하게 지시하여 내적 동기를 촉발시켜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모든 리더는 세심함과 모호함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덕목을 한 몸에 무장하여, 상황에 따라 크고 작은 인간적 모습을 선택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운명이다.

**
변리사가 되어 사무소를 개업하고 나니 직원들을 교육시키고 일을 검수할 일이 내 일을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우리 업무의 특성상 오류가 허용되지 않으니 꼼꼼한 검수가 불가피하다. 워낙 다부지게 가르치니 한 때 우리 사무소는 변리사 업계의 사관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모든 메일과 문서 등의 작성에 있어 그 디테일에 집착하여 빈틈없이 검수한다. 내게 결재 올라온 서류에 칭찬은 없다. 가차없는 지적 사항들로 넘쳐난다. 최근에야 그 지적질 버릇을 좀 줄이긴 했지만 내 속의 '디테일의 악마'로 인해 그동안 적잖은 내상을 입은 수많은 영혼들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오래 전에 우리 사무실에서 실무 수습을 하였던 변리사를 얼마 전에 만났더니, 그 당시에 내가 지적해주었던 초안들을 아직 간직하고 가끔 들여다 본다고 한다. 낯이 화끈거렸다. 설마 내가 가르쳐준 것을 복습하기 위해 볼 것 같지는 않다.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지적질 투성이 초안을 다시 들여다 보았을까?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아닌지 몰라.

..
어제 저녁에 아들 방에서 모자 간의 대화가 좀 날카로워지더니,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내게까지 거슬리게 들려왔다. 대충 상황을 보니, 한참 정신 없을 고3 아들이 인터넷으로 딴 짓을 좀 하고 있었고, 그걸 본 아내는 더 빡세게 수험 준비를 하지 않는다고 이것저것 지적한 듯하다. 아들은 엄마의 지적하는 언어나 내용이 너무 불편하다고 그렇게 기분 나쁘게 말할 거 뭐 있냐고 반발하고 있다. 한참을 듣다가 둘다 불러서 잠시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아들의 태도를 중점으로 지적하며 어찌 풀리기는 했지만, 나는 사실 아내의 지적(질책) 방법이 영 마음에 불편하다. 그냥 '수험 준비 좀더 집중해서 노력해야지?' 정도로만 말하면 아들은 혼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에게, 지난 모의고사에서 어느 과목은 몇 등급이고 전체는 어떻게 되는데 지금 그런 식으로 긴장을 풀고 있으면 결과가 어찌 되겠냐는 식으로 바늘로 찌르듯 콕콕 집어서 말하면, 설사 그 말이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듣는 아이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설사 어찌 좀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촛불만큼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질책에 훅 꺼져버리고 말지 않겠는가. 
고3은 지금 한창 피말리게 경기를 하고 있는 라운딩 중의 골프 선수와 같다. 그런 선수에게는 그저 총괄적인 상위개념으로 간단히 말하는 게 좋다. 이렇게.. "아들아~ 잘 하고 있나?" 혹은 "힘들재? 쉬엄쉬엄해라~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거든.' 



..
그래서 이런 격언이 생각난다.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과도한 디테일은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망가뜨리는 악마가 될 수 있다. 악마는 그냥 디테일 속에 숨겨서 드러내지 말고, 그저 상위 개념만 언급하는 것이 평화와 사랑을 유지하는 최고의 지혜이다.

여하튼 이것저것 생각해보면, 우리 전라도 말 속의 '거시기'라는 표현이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다.

'여러분들~ 경기가 어려운 요즘 다들 거시기 하고 하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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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


오늘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 산소에 가서 여러가지 꽃나무를 심었다.

다음 주가 되면 어머니가 가신지 만 1년이 되기에, 아버지는 묘목을 미리 준비해두시고는 날을 잡아 우리 형제들을 불러 따르게 하셨다.

묘목은 거의 30포기 정도에 종류도 참 다양하게도 골라 오셨다. 산수유, 앵두, 석류, 대추나무, 철쭉 등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싶으시단다.

앵두나무는 벌써 몽우리가 벌어져 있으니, 내년부터 해마다 이맘 때 어머니 기일(음력 3월 초이틀)이 다가오면 앙증맞은 앵두꽃이 만개하게 될거다. 앵두꽃 옆에는 참꽃과 개나리도 함께 필테고, 몇 년 지나면 산수유도 껑충히 한몫 거들게 될 거니까, 그 땐 환상적인 꽃의 오케스트라를 연출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초봄 꽃들의 향연이 조금 시들해지고 어머니 생신(음력 4월 11일)이 다가올 때 쯤이면 아마도 철쭉과 석류꽃이 바통을 이어서 한동안 주위의 녹음과 어우러져 어머니 산소를 장식해 주게 되겠지.

아버지는 나무들 사이에 국화를 심으시겠다고 하신다. 당연히 가을의 외로움을 덜어주시려는 배려이신 거지.

옛날,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많으셨다.
특히 지지리도 정도 없는 양반이라고.. 사실 좀 그렇긴 하셨다. 대부분의 경상도 남자가 그러하듯..

하지만 지나고 보니 어머니의 투정은 맞지 않은 것 같다.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우신 후, 동생 내외가 모시고 살면서 무척이나 고생도 하고 정성을 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방의 한 침대에서 생활하시는 아버지 당신께서 정작 직접 하셨던 긴 병치레의 온갖 궃은 수발은 어느 자식도 대신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 이토록 이 산소를 공단같이 꾸미시는 애틋한 정성을 보면 누가 정이 없는 양반이라 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어린 동생들을 사실상 키우시다가, 7남매의 장남이신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셔서, 대가족을 수발하며 우리 5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5척 단구의 갸날픈 체구의 약한 몸으로 작지 않은 규모의 농가 살림을 단손으로 감당해내셨지. 어린 우리가 봐도 너무도 눈물겹게 힘든 일생을 보내셨다. 그런데 자식들이 그나마 세상에 나가서 사람 행세를 하는 듯할 즈음에 덜컥 쓰러지셔서 근 7~8년 이상을 자리보전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쩌면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신 이후의 기간이 오히려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때였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벽창호 같은 아버지께서 24시간 대소변 수발을 포함해서 지극 정성으로 수발을 들어주시고, 온갖 역정이며 투정도 조금도 거리껴하시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젊을 때 무심했던 남편에게 제대로 충분히 보복을 하시고 덤으로 보상을 받으신 셈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이후에 산소를 저토록 정성으로 꽃단장을 해드리고 계시니,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기분은 어떠하실까.

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항상 듣던 그 말씀을 섞어서 심계를 드러내 놓으신다.

“범을 청치 말고 숲을 짙게 하라는 말처럼,
앵두가 열리고 석류가 익으면
자손들에게 오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고 싶어지지 않겠나”

[201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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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아버지의 여행 소동


아버지가 혼자서 여행을 가시겠다고 한다.
동생들이 말리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곧 아흔이 되실 상노인이 우찌 그리 가당찮은 생각을 하셨을까.


어딜 그렇게 가시고 싶습니꺼?
- 새만금도 들러보고 청주에도 가보고,
서울에 너그 집에 가서도 며칠 있다 올란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더.
- 안된다. 니하고 댕기믄 싸워싸서 재미엄따.
그라믄 애미하고 다니시지예.
- 며느리하고 다녀도 재미엄따.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다니고 싶다.

밥은 우짜고예.
- 컵라면 사먹으면 된다. 
잠은요?
- 여인숙에 가서 자믄 되지.
요즘 여인숙 없습니더.
- 그라믄 유곽에라도 가서 잘끼다.
유곽이라는 거 없어진지 수십년도 더 됐습니더.
- 요즘 날씨에는 한데서 자도 된다.


기가 찬다. 
요지부동이시다. 내일 아침부터 보초를 서야 할 판이다.
반쯤 통사정을 하고 반쯤 윽박질러서 일단은 고집을 약간 돌려놓은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현재 계신 위치를 모니터링해야 할 것 같다.

필경 우리 자식들에게 뭔가 서운한 게 많이 쌓여 있으신 것 같은데,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않으시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앞만 보고 달려오신 당신의 삶에서 허무함을 느끼신 것일까?


오로지 가족들이 굶지 않게 하고 남들 만큼이라도 가르치고 입히려고 온몸을 다바쳐 뼈빠지게 희생하며 살아오신 삶이다. 거기다 별 내세울 거 없는 집안이지만 그래도 나름 물려받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봉제사와 선산 돌보기를 거의 종교 수준으로 수행해오지 않으셨던가. 스스로를 버리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살아온 그 한 평생을 돌아보면 이 연세에 어찌 아릿한 회한이 없으랴. 

가만 생각하니.. 지금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워낙 실질(?)을 추구하시는 분이라 비생산적인 것을 몹시도 싫어하셨다.
평생 농사일을 해오신 탓에 허투루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아버지 앞에서는 음악, 운동, 여행, 외식 등과 같은 말은 금기 단어이다. 지금도 손자들이 학교 생활로 악기를 들고 다니면,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니며 음악을 하였던 집안의 한 아재가 무능과 게으름으로 온 집안을 망하게 만든 사례를 들며, 당장이라도 악기를 부셔버릴 듯 흥분하신다. 그 아재의 이야기는 자식 대와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수십 수백 번도 더 반복하셨다. 그리고 가벼운 운동이라도 한다고 하면 우리 논이나 한바퀴 둘러보고 오라고 호통을 치시곤 했었다.

그러던 분이 거동이 불편해지고 생각이 흐려져 가는 이제에 와서 세상 구경을 하시겠단다. 못해본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풀고 싶어 조급증을 내시는 듯하다.
그래.. 이제부터 우짜든지 시간을 내서 좀 모시고 다녀야겠다고 반성과 다짐을 한다. 하지만 굳이 혼자 다니시겠다고 저리 고집을 부리시니 어쩐다.


그런데,아버지!

저도 정말이지.. 혼자서 유람 좀 다녀보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아버지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그나저나 당장 어떻게 해봐야 하나..

[2015.09. 02. 페이스북 포스팅]

<2011년 1월17일, 외손녀의 안내로 일본 여행 모시고 갈 때 공항에서 찍은 것>


**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우여곡절 끝에 분당의 우리 집으로 안전하게 모심으로써 여행 해프닝은 마무리되었다. 김해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올라 오셔서, 며칠 동안 서울 인근의 구경도 하고 지내시다가 내려가셨다. 며칠 지나보니 모든 식구들이 바삐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 홀로 계셔야 하기도 하고, 출입하기도 어려운 도시의 아파트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영 체질에 맞지 않으신 거다. 고향에 내려가신 후 딸네들과 멀고 가까운 곳을 몇 군데 여행 다니시긴 하셨는데, 최근에는 여행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으신다. 마음이 안정되신 건지 체력이 떨어지신 건지.. 여하튼 내게는 여전히 마음의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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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똥장군


**
옛날 변소는 대소변을 구덩이에 그대로 가둬두었다가 양이 차면 퍼내야 하는 소위 푸세식이다. 양이 충분히 쌓이고 거름으로 쓸만큼 적절히 삭으면 푸어야 한다. 이를 '변소 친다'라고 한다. 우리집에는 나란히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거름으로 잘 삭히기 위해 교대로 썼던 듯하다. 

경상도에서 변소를 '통시'라 불렀다. '통시'는 변소나 화장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변소'는 뒷간 전체의 공간적 개념이 강하다면, '통시'는 똥통 구덩이의 의미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변소에 빠졌다'라는 말보다 '통시에 빠졌다'라는 말을 더 쉽게 썼으니까. 

어릴 때 변소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통시' 위에 평행하게 걸쳐둔 판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하는데, 애들에게는 아래의 깊고 넓은 구덩이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기다 큰 아이들이 들려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와 같은 이야기까지 생각나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통시에 앉아야 할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생각나서 아래에서 종이 든 손이 올라오는 상상이 떠오른다. 그 통시에 가끔 구데기를 쫒던 닭이 빠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죽은 닭은 요리가 되어 밥상에 올라왔었다. 드물지만 아이들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백설기를 해서 돌린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놀란 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매우 효과적인 심리 요법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빠져 본적은 없는데 앞집 애가 가끔 빠졌다. 떡을 보면 '니 통시 빠졌재?'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가끔은 '떡 좀 먹고 싶다'라고 하며 놀리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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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다양한 교육 방법 중에 너무도 가혹하고 비가역적인 징계가 있었다. 내가 힘들게 모은 귀한 재산을 '통시'에 갖다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 내 재산이라고 해봐야 딱지나 구슬이고, 어떤 땐 빌려온 만화책이 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따먹기'를 잘했다. 한 번은 동네 아이들에게서 따온 종이로 접은 딱지가 비료 푸대로 두어 자루나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엄마는 그 모두를 통시에 갖다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때 경험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아는 사람을 알 것이다. 잘 뒤집어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갖도록 딱지를 정성스레 만드는 과정과 따먹기하는 동안의 그 혼신의 집중력과 인고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었다면, 엄마로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뒤에 또 한번 천붕지통(天崩之痛)경험하였다. 이제는 구슬이었다. 죽기살기로 따모아서 소머리 분유 깡통에 몇 통을 채웠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뒷뜰에다 용의주도하게 파뭍어두었는데, 그게 어떻게 들통이 난 것이다. 학교에 갔다오니 빈 깡통만 마당에 나동그라져 있고 구슬들은 통시 속에서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구슬들을 모으기까지의 노력을 생각하니 저 귀한 것들을 그냥 저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똥바가지로 들어내고 푸대에 담아 개울로 가져갔다. 헹구고 씻고 말려서 다시 썼다.

친구에게서 빌려온 만화책을 통시에 빠트렸을 때의 절망감과 그 뒤의 시련은 필설로 다 설명 못할 정도이다. 만화방에서 빌려온 것이니 책값을 돈으로 갚아야 한다. 그게 얼마였던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그 돈을 갚기 위해 나는 상당 기간을 처절하게 노력하여야 했다. 비닐하우스 철거할 때 나오는 폐비닐을 모아 고물상에 팔기도 하고, 뒷마당서 굴껍질(우리집은 조개무지와 가까워 땅을 파면 굴껍질이 많아 나왔다)을 캐서 양계장에 갖다 팔았다. 가끔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 삥땅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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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집을 새로 지었다. 그 전의 초가집을 헐고 슬라브 구조의 양옥집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새 집에서는 집 본채에 화장실이 있기를 희망헀다. 부산의 친구집에서 본 수세식 화장실이 무척 부러웠다. 아버지에게 강하게 요청을 하고 건축업자도 설계에서 그런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집으로 화장실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여전히 재래식으로 다만 좀더 깔끔해진 구조로 지어졌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밥 먹는 곳 가까이에 변소가 있는 그런 불결한 구조를 허용할 수 없고, 아까운 거름을 하수구에 내버리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셨다.
화장실이 승격되어 본채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된 때는 결혼 10주년쯤 되었을 때 새 집을 지으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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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시를 칠 때에는 곰삭은 거름을 똥장군에 퍼담는다. 그러고는 자전거나 수레에 싣고 논과 밭으로 실어 날라야 한다. 고등학교 때 쯤부터 그 똥장군 나르기 작업은 나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는 굳이 그 곤란한 일을 다른 일꾼들 제쳐놓고 내게 맡기셨다. 이송 수단은 주로 짐자전거였다. 

똥장군은 와인발효용 오크통과 구조가 비슷하다. 내부의 공간을 두고 나무판재를 통형상으로 둘러가며 치밀하게 짜맞추고 대나무 테두리로 견고히 둘러 고정한 구조이다. 나무판재들 사이의 틈새는 아교로 때운다. 아무래도 오래 쓰면 틈새가 벌어져 조금씩 새기도 하고, 많이 낡으면 길이방향의 양단을 막고 있는 마감 판재마저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 똥장군을 나르는 일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나다니며 냄새로 동네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미안함이 있으니 신속히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그러니 새 신부가 시댁의 신주를 모시듯 조심하면서 빨리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내용물은 액체가 아닌가. 무게도 상당하다. 잘은 몰라도 40~50kg은 족히 나가지 싶다. 워낙 조심해서 다녀서인지, 먹을 것을 싣고 다니다 엎어본 적은 있어도 똥장군을 엎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똥장군은 정말 더러운 것이기에 오히려 진정으로 신주 모시듯 귀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가 그 위태로운 일을 굳이 내게 시키셨던 깊은 뜻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살아 오면서 그런 경험을 적잖이 했다. 똥장군과 같은 사람, 똥장군과 같은 일거리..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일일수록 혼신의 정성을 다하여야 더 큰 후회꺼리를 만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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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장군 나르기의 정작 곤란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건 사람들의 관심이다. 똥장군에서 나는 냄새와 불결함은 내가 구경꺼리가 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논으로 가려면 동네 웃깍단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그게 동네 사람들에게는 희안한 볼꺼리였다. 그 중에는 똥장군 나르는 내 모습을 가급적이면 보이고 싶지 않을 여학생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당시에 나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그 귀한 대학생이 똥장군을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게 구경꺼리가 될만도 했지 싶다. 동네 아지매들은 나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외동 양반 참말로 얄궂고 별나시재. 우째 저 귀한 아들을 세상에 저런 일을 시키실까?. 일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판검사 되시면 나중에 똥장군 판검사라 놀림 당할낀데' 등등..

아버지는 왜 똥장군 나르기를 내게 맡기셨을까. 물론 농가에서는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 누구든지 걸리는 대로 일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게 농가 가장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똥장군이다. 집에는 항상 일을 도와주러오는 일꾼들이 몇 있었으니 그들에게 시킬 수 있었을 거다. 그러면 한창 때의 아들 체면이 좀 덜 망가졌을텐데.

가만히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응당 그러실 만도 하다. 아버지는 일꾼들과 함께 일을 해도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남을 시키지 않고 직접 하셨다. 심지어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집 울타리 나무의 가지를 칠 때, 불러온 일꾼들은 아래에 떨어진 가치를 치우는 일을 하게 하고 손수 나무 위에 올라가셔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셨다. 내가 보고 기겁을 해서 교대하긴 하셨지만, 위험하거나 더러운 일은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시다. 똥장군 나르기도 그 일이 워낙 궃은 일이고, 일꾼들도 동네에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으니, 그들도 동네 한복판을 다닐 때 나름의 체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남이 아닌 아들이 똥장군을 다루는 게 너무도 지당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가 나의 얄팍한 재주를 가벼이 자랑하고 대학생입네하고 거들먹대며 조금씩 교만해지는 모습이 아버지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라고 항상 가르치셨다. 나의 경박한 교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명백히 반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머리 꼭지로 올라가는 나의 교만을 어떻게든 제대로 다잡아 경계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똥장군으로 교만을 억눌러주셨고, 그 덕분에 세월이 상당히 지나고 나서도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남달리 기특한 대학생 청년이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끝)



##  덧붙임말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논두렁이나 잔디밭에서 다른 풀에 비해 눈에 드러나게 자란 풀은 필시 잘려나가기 마련이다. 사람도 제가 똑똑하다고 교만하여 남의 눈에 드러나면 시기를 받아서나 조직의 건강을 위해 그것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
    원래는 '범을 청치 말고 갓을 짓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릴 땐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좀 자라서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갓'은 작은 산 혹은 숲을 의미한다. 범(호랑이)은 오라고 청한다고 해서 오는 동물이 아니다. 숲이 짙으면 작은 동물과 큰 동물이 모이게 되고, 그러면 범은 먹이가 있는 그 숲으로 저절로 오게 되어있다. 그러니 내가 나의 숲 즉 덕을 충분히 쌓으면 사람들은 내가 굳이 오라고 청하지 않더라도 내게 몰려든다는 가르침이다. 도리불언 하자성혜(蹊, 복숭아와 자두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길이 저절로 난다)와 같은 의미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