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習_아테나이칼럼'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8.09.02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
  2. 2018.09.02 아버지의 여행 소동
  3. 2018.08.11 똥장군
  4. 2018.07.21 아버지에게서 배운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법 (1)
  5. 2018.03.21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2011.3. 29에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


오늘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 산소에 가서 여러가지 꽃나무를 심었다.

다음 주가 되면 어머니가 가신지 만 1년이 되기에, 아버지는 묘목을 미리 준비해두시고는 날을 잡아 우리 형제들을 불러 따르게 하셨다.

묘목은 거의 30포기 정도에 종류도 참 다양하게도 골라 오셨다. 산수유, 앵두, 석류, 대추나무, 철쭉 등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싶으시단다.

앵두나무는 벌써 몽우리가 벌어져 있으니, 내년부터 해마다 이맘 때 어머니 기일(음력 3월 초이틀)이 다가오면 앙증맞은 앵두꽃이 만개하게 될거다. 앵두꽃 옆에는 참꽃과 개나리도 함께 필테고, 몇 년 지나면 산수유도 껑충히 한몫 거들게 될 거니까, 그 땐 환상적인 꽃의 오케스트라를 연출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초봄 꽃들의 향연이 조금 시들해지고 어머니 생신(음력 4월 11일)이 다가올 때 쯤이면 아마도 철쭉과 석류꽃이 바통을 이어서 한동안 주위의 녹음과 어우러져 어머니 산소를 장식해 주게 되겠지.

아버지는 나무들 사이에 국화를 심으시겠다고 하신다. 당연히 가을의 외로움을 덜어주시려는 배려이신 거지.

옛날,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많으셨다.
특히 지지리도 정도 없는 양반이라고.. 사실 좀 그렇긴 하셨다. 대부분의 경상도 남자가 그러하듯..

하지만 지나고 보니 어머니의 투정은 맞지 않은 것 같다.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우신 후, 동생 내외가 모시고 살면서 무척이나 고생도 하고 정성을 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방의 한 침대에서 생활하시는 아버지 당신께서 정작 직접 하셨던 긴 병치레의 온갖 궃은 수발은 어느 자식도 대신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 이토록 이 산소를 공단같이 꾸미시는 애틋한 정성을 보면 누가 정이 없는 양반이라 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어린 동생들을 사실상 키우시다가, 7남매의 장남이신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셔서, 대가족을 수발하며 우리 5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5척 단구의 갸날픈 체구의 약한 몸으로 작지 않은 규모의 농가 살림을 단손으로 감당해내셨지. 어린 우리가 봐도 너무도 눈물겹게 힘든 일생을 보내셨다. 그런데 자식들이 그나마 세상에 나가서 사람 행세를 하는 듯할 즈음에 덜컥 쓰러지셔서 근 7~8년 이상을 자리보전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쩌면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신 이후의 기간이 오히려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때였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벽창호 같은 아버지께서 24시간 대소변 수발을 포함해서 지극 정성으로 수발을 들어주시고, 온갖 역정이며 투정도 조금도 거리껴하시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젊을 때 무심했던 남편에게 제대로 충분히 보복을 하시고 덤으로 보상을 받으신 셈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이후에 산소를 저토록 정성으로 꽃단장을 해드리고 계시니,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기분은 어떠하실까.

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항상 듣던 그 말씀을 섞어서 심계를 드러내 놓으십니다.

“범을 청치 말고 숲을 짙게 하라는 말처럼,
앵두가 열리고 석류가 익으면
자손들에게 오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고 싶어지지 않겠나”

[20110329]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 페이스복에 2015년 9월2일에 포스팅하였던 글]


아버지의 여행 소동


아버지가 혼자서 여행을 가시겠다고 한다.
동생들이 말리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곧 아흔이 되실 상노인이 우찌 그리 가당찮은 생각을 하셨을까.


어딜 그렇게 가시고 싶습니꺼?
- 새만금도 들러보고 청주에도 가보고,
서울에 너그 집에 가서도 며칠 있다 올란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더.
- 안된다. 니하고 댕기믄 싸워싸서 재미엄따.
그라믄 애미하고 다니시지예.
- 며느리하고 다녀도 재미엄따.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다니고 싶다.

밥은 우짜고예.
- 컵라면 사먹으면 된다. 
잠은요?
- 여인숙에 가서 자믄 되지.
요즘 여인숙 없습니더.
- 그라믄 유곽에라도 가서 잘끼다.
유곽이라는 것도 이제 없습니더.
- 요즘 날씨에는 한데서 자도 된다.


기가 찬다. 
요지부동이시다. 내일 아침부터 보초를 서야 할 판이다.
반쯤 통사정을 하고 반쯤 윽박질러서 일단은 고집을 약간 돌려놓은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현재 계신 위치를 모니터링해야 할 것 같다.

필경 우리 자식들에게 뭔가 서운한 게 많이 쌓여 있으신 것 같은데,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않으시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앞만 보고 달려오신 당신의 삶에서 허무함을 느끼신 것일까?


오로지 가족들이 굶지 않게 하고 남들 만큼이라도 가르치고 입히려고 온몸을 다바쳐 뼈빠지게 희생하며 살아오신 삶이다. 거기다 별 내세울 거 없는 집안이지만 그래도 나름 물려받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봉제사와 선산 돌보기를 사실상 종교 수준으로 수행해오지 않으셨던가. 스스로를 버리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살아온 그 한 평생을 돌아보면 이 연세에 어찌 아릿한 회한이 없으랴. 

가만 생각하니.. 지금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워낙 실질(?)을 추구하시는 분이라 비생산적인 것을 몹시도 싫어하셨다.
평생 농사일을 해오신 탓에 허투루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아버지 앞에서는 음악, 운동, 여행, 외식 등과 같은 말은 금기 단어이다. 지금도 손자들이 학교 생활로 악기를 들고 다니면,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니며 음악을 하였던 집안의 한 아재가 무능과 게으름으로 온 집안을 망하게 만든 사례를 들며, 당장이라도 악기를 부셔버릴 듯 흥분하신다. 그 아재의 이야기는 자식 대와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수십 수백 번도 더 반복하셨다. 그리고 가벼운 운동이라도 한다고 하면 우리 논이나 한바퀴 둘러보고 오라고 호통을 치시곤 했었다.

그러던 분이 거동이 불편해지고 생각이 흐려져 가는 이제에 와서 세상 구경을 하시겠단다. 못해본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풀고 싶어 조급증을 내시는 듯하다.
그래.. 이제부터 우짜든지 시간을 내서 좀 모시고 다녀야겠다고 반성과 다짐을 한다. 하지만 굳이 혼자 다니시겠다고 저리 고집을 부리시니 어쩐다.


그런데,아버지!

저도 정말이지.. 혼자서 유람 좀 다녀보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아버지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그나저나 당장 어떻게 해봐야 하나..

[2015.09. 02. 페이스북 포스팅]

<2011년 1월17일, 외손녀의 안내로 일본 여행 모시고 갈 때 공항에서 찍은 것>


**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우여곡절 끝에 분당의 우리 집으로 안전하게 모심으로써 여행 해프닝은 마무리되었다. 김해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올라 오셔서, 며칠 동안 서울 인근의 구경도 하고 지내시다가 내려가셨다. 며칠 지나보니 모든 식구들이 바삐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 홀로 계셔야 하기도 하고, 출입하기도 어려운 도시의 아파트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영 체질에 맞지 않으신 거다. 고향에 내려가신 후 딸네들과 멀고 가까운 곳을 몇 군데 여행 다니시긴 하셨는데, 최근에는 여행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으신다. 마음이 안정되신 건지 체력이 떨어지신 건지.. 여하튼 내게는 여전히 마음의 빚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똥장군


**
옛날 변소는 대소변을 구덩이에 그대로 가둬두었다가 양이 차면 퍼내야 하는 소위 푸세식이다. 양이 충분히 쌓이고 거름으로 쓸만큼 적절히 삭으면 푸어야 한다. 이를 '변소 친다'라고 한다. 우리집에는 나란히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거름으로 잘 삭히기 위해 교대로 썼던 듯하다. 

경상도에서 변소를 '통시'라 불렀다. '통시'는 변소나 화장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변소'는 뒷간 전체의 공간적 개념이 강하다면, '통시'는 똥통 구덩이의 의미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변소에 빠졌다'라는 말보다 '통시에 빠졌다'라는 말을 더 쉽게 썼으니까. 

어릴 때 변소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통시' 위에 평행하게 걸쳐둔 판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하는데, 애들에게는 아래의 깊고 넓은 구덩이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기다 큰 아이들이 들려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와 같은 이야기까지 생각나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통시에 앉아야 할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생각나서 아래에서 종이 든 손이 올라오는 상상이 떠오른다. 그 통시에 가끔 구데기를 쫒던 닭이 빠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죽은 닭은 요리가 되어 밥상에 올라왔었다. 드물지만 아이들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백설기를 해서 돌린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놀란 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매우 효과적인 심리 요법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빠져 본적은 없는데 앞집 애가 가끔 빠졌다. 떡을 보면 '니 통시 빠졌재?'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가끔은 '떡 좀 먹고 싶다'라고 하며 놀리기도 했었다.


**
엄마의 다양한 교육 방법 중에 너무도 가혹하고 비가역적인 징계가 있었다. 내가 힘들게 모은 귀한 재산을 '통시'에 갖다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 내 재산이라고 해봐야 딱지나 구슬이고, 어떤 땐 빌려온 만화책이 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따먹기'를 잘했다. 한 번은 동네 아이들에게서 따온 종이로 접은 딱지가 비료 푸대로 두어 자루나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엄마는 그 모두를 통시에 갖다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때 경험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아는 사람을 알 것이다. 잘 뒤집어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갖도록 딱지를 정성스레 만드는 과정과 따먹기하는 동안의 그 혼신의 집중력과 인고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었다면, 엄마로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뒤에 또 한번 천붕지통(天崩之痛)경험하였다. 이제는 구슬이었다. 죽기살기로 따모아서 소머리 분유 깡통에 몇 통을 채웠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뒷뜰에다 용의주도하게 파뭍어두었는데, 그게 어떻게 들통이 난 것이다. 학교에 갔다오니 빈 깡통만 마당에 나동그라져 있고 구슬들은 통시 속에서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구슬들을 모으기까지의 노력을 생각하니 저 귀한 것들을 그냥 저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똥바가지로 들어내고 푸대에 담아 개울로 가져갔다. 헹구고 씻고 말려서 다시 썼다.

친구에게서 빌려온 만화책을 통시에 빠트렸을 때의 절망감과 그 뒤의 시련은 필설로 다 설명 못할 정도이다. 만화방에서 빌려온 것이니 책값을 돈으로 갚아야 한다. 그게 얼마였던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그 돈을 갚기 위해 나는 상당 기간을 처절하게 노력하여야 했다. 비닐하우스 철거할 때 나오는 폐비닐을 모아 고물상에 팔기도 하고, 뒷마당서 굴껍질(우리집은 조개무지와 가까워 땅을 파면 굴껍질이 많아 나왔다)을 캐서 양계장에 갖다 팔았다. 가끔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 삥땅하기도 하고..

**
대학 1학년 때 집을 새로 지었다. 그 전의 초가집을 헐고 슬라브 구조의 양옥집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새 집에서는 집 본채에 화장실이 있기를 희망헀다. 부산의 친구집에서 본 수세식 화장실이 무척 부러웠다. 아버지에게 강하게 요청을 하고 건축업자도 설계에서 그런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집으로 화장실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여전히 재래식으로 다만 좀더 깔끔해진 구조로 지어졌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밥 먹는 곳 가까이에 변소가 있는 그런 불결한 구조를 허용할 수 없고, 아까운 거름을 하수구에 내버리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셨다.
화장실이 승격되어 본채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된 때는 결혼 10주년쯤 되었을 때 새 집을 지으면서였다.



**
통시를 칠 때에는 곰삭은 거름을 똥장군에 퍼담는다. 그러고는 자전거나 수레에 싣고 논과 밭으로 실어 날라야 한다. 고등학교 때 쯤부터 그 똥장군 나르기 작업은 나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는 굳이 그 곤란한 일을 다른 일꾼들 제쳐놓고 내게 맡기셨다. 이송 수단은 주로 짐자전거였다. 

똥장군은 와인발효용 오크통과 구조가 비슷하다. 내부의 공간을 두고 나무판재를 통형상으로 둘러가며 치밀하게 짜맞추고 대나무 테두리로 견고히 둘러 고정한 구조이다. 나무판재들 사이의 틈새는 아교로 때운다. 아무래도 오래 쓰면 틈새가 벌어져 조금씩 새기도 하고, 많이 낡으면 길이방향의 양단을 막고 있는 마감 판재마저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 똥장군을 나르는 일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나다니며 냄새로 동네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미안함이 있으니 신속히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그러니 새 신부가 시댁의 신주를 모시듯 조심하면서 빨리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내용물은 액체가 아닌가. 무게도 상당하다. 잘은 몰라도 40~50kg은 족히 나가지 싶다. 워낙 조심해서 다녀서인지, 먹을 것을 싣고 다니다 엎어본 적은 있어도 똥장군을 엎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똥장군은 정말 더러운 것이기에 오히려 진정으로 신주 모시듯 귀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가 그 위태로운 일을 굳이 내게 시키셨던 깊은 뜻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살아 오면서 그런 경험을 적잖이 했다. 똥장군과 같은 사람, 똥장군과 같은 일거리..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일일수록 혼신의 정성을 다하여야 더 큰 후회꺼리를 만들지 않는 법이다.

**
똥장군 나르기의 정작 곤란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건 사람들의 관심이다. 똥장군에서 나는 냄새와 불결함은 내가 구경꺼리가 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논으로 가려면 동네 웃깍단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그게 동네 사람들에게는 희안한 볼꺼리였다. 그 중에는 똥장군 나르는 내 모습을 가급적이면 보이고 싶지 않을 여학생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당시에 나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그 귀한 대학생이 똥장군을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게 구경꺼리가 될만도 했지 싶다. 동네 아지매들은 나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외동 양반 참말로 얄궂고 별나시재. 우째 저 귀한 아들을 세상에 저런 일을 시키실까?. 일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판검사 되시면 나중에 똥장군 판검사라 놀림 당할낀데' 등등..

아버지는 왜 똥장군 나르기를 내게 맡기셨을까. 물론 농가에서는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 누구든지 걸리는 대로 일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게 농가 가장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똥장군이다. 집에는 항상 일을 도와주러오는 일꾼들이 몇 있었으니 그들에게 시킬 수 있었을 거다. 그러면 한창 때의 아들 체면이 좀 덜 망가졌을텐데.

가만히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응당 그러실 만도 하다. 아버지는 일꾼들과 함께 일을 해도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남을 시키지 않고 직접 하셨다. 심지어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집 울타리 나무의 가지를 칠 때, 불러온 일꾼들은 아래에 떨어진 가치를 치우는 일을 하게 하고 손수 나무 위에 올라가셔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셨다. 내가 보고 기겁을 해서 교대하긴 하셨지만, 위험하거나 더러운 일은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시다. 똥장군 나르기도 그 일이 워낙 궃은 일이고, 일꾼들도 동네에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으니, 그들도 동네 한복판을 다닐 때 나름의 체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남이 아닌 아들이 똥장군을 다루는 게 너무도 지당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가 나의 얄팍한 재주를 가벼이 자랑하고 대학생입네하고 거들먹대며 조금씩 교만해지는 모습이 아버지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라고 항상 가르치셨다. 나의 경박한 교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명백히 반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머리 꼭지로 올라가는 나의 교만을 어떻게든 제대로 다잡아 경계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똥장군으로 교만을 억눌러주셨고, 그 덕분에 세월이 상당히 지나고 나서도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남달리 기특한 대학생 청년이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끝)



##  덧붙임말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논두렁이나 잔디밭에서 다른 풀에 비해 눈에 드러나게 자란 풀은 필시 잘려나가기 마련이다. 사람도 제가 똑똑하다고 교만하여 남의 눈에 드러나면 시기를 받아서나 조직의 건강을 위해 그것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
    원래는 '범을 청치 말고 갓을 짓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릴 땐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좀 자라서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갓'은 작은 산 혹은 숲을 의미한다. 범(호랑이)은 오라고 청한다고 해서 오는 동물이 아니다. 숲이 짙으면 작은 동물과 큰 동물이 모이게 되고, 그러면 범은 먹이가 있는 그 숲으로 저절로 오게 되어있다. 그러니 내가 나의 숲 즉 덕을 충분히 쌓으면 사람들은 내가 굳이 오라고 청하지 않더라도 내게 몰려든다는 가르침이다. 도리불언 하자성혜(蹊, 복숭아와 자두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길이 저절로 난다)와 같은 의미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아버지에게서 배운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법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에 지게를 져야할 일이 많았다. 
지게는 옛날 농가의 필수적인 수송수단이었다. 오로지 사람의 어깨에 의존하여 물건을 이동시켜야 하는데, 힘과 경험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쌀가마를 서너가마씩 쉽게 지거나 자기 키의 몇 배 되는 부피의 땔감을 지고 좁은 논두렁을 태연히 걸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좀 몸에 익으면 사람의 힘으로 짐을 옮기는 데에는 이만큼 효율적인 도구도 없을 것 같다.

지게짐을 질 때 가장 힘든 것은 세워둔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과정이다. 일단 일어설 수만 있다면, 짐이 웬만큼 무거워도 지게가 등에 밀착되어 있어 발걸음을 떼고 걷을 수 있다. 지게 작대기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기도 하지만 정작 무거운 짐은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그 해 아버지는 양파 농사를 크게 하셨다. 논에 뽑아논 엄청난 양의 양파를 도로에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지게를 져보게 되었다. 가벼운 짐을 지고 다닌 경험이야 많았었지만, 제대로 일답게 짐을 져본 일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바지게(지게 위에 얹혀 짐을 담는 소쿠리 같은 물건)에 남들만큼 양파 다발을 얹어 담기까지는 했는데,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다.
짐이 무거우니 허리를 굽혀서 일어나야 하는데, 허리를 굽히면 짐이 머리를 넘어 앞으로 쏟아지고,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다리에 힘을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오셔서 도와주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도와주신 방법은 너무도 신통했다. 그 버거운 짐을 거짓말같이 쉽게 지고 일어날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그저 아버지는 나에게 뒤로 마구 뻗대라고 하시고는 짐을 진 내 뒤에서 지게를 앞쪽으로 사정없이 앞으로 미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뒤에서 미는 힘에 대항하여 뒤쪽으로 힘껏 뻗대야 했고, 그러자 믿기 힘들 정도로 금세 일어서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을 기억한다.
도와 주는 사람은 들어주는 게 아니라 밀어줘야 하는 거다.

그건 바로 기초 물리에서 배운 합력의 원리이다. 앞에서 뒤로 뻗대는 힘(F1)과 뒤에서 미는 힘(F2)이 상호 작용을 하여 상향의 합력(FR)을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시도해보았다. 내가 도움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해보았지만, 아버님와 함께 하던 것처럼 그렇게 원만히 잘 되지가 않았다. 그건 상대에 대한 강한 믿음과 이 작용의 효과에 대한 믿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다부지게 서로 함께 힘을 써야만 하는데, 어느 한 한 쪽에라도 믿음이 부족하면 충분히 힘을 쓰지 못하여 상승 방향의 합력이 충분히 발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주고자 때는 통상 그 사람이 힘을 쓰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힘을 더해줌으로써 짐을 덜어준다. 물건을 들 때는 드는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는 나아가는 순방향으로 힘을 보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지게를 지고 일어나게 돕는 방법은 오히려 그 반대로 역방향의 힘을 가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사실 짐을 지고 일어서는 힘의 거의 대부분은 짐을 지는 당사자에게서 나온다. 도와주는 사람의 역할은 짐지는 사람이 일어설 때 뒤로 밀리지 않도록 역방향의 힘으로 뒤에서 밀어 받쳐주는 것이다.

사람의 성장을 도울 때도 지게짐 돕는 것과 다르지 않다. 쉽게 일어나도록 짐을 덜어주는 것보다, 자신의 성장 반발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거스르는 힘을 가해주는 것이 제대로 이끌어주는 방법이다.  


짐수레를 끌고 오르막을 오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은 짐을 실고 얕은 언덕을 오를 때는 그저 뒤에서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수레의 짐이 많고 경사가 급한 언덕을 오를 때는 밀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더 방해가 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밀어주는 것보다 앞의 운전자의 손잡이에 큰 부하를 가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도움 방법이다. 그래서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짐수레를 앞으로 밀지 말고 짐수레의 뒷단을 위로 들어 올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운전자는 지면과의 강한 밀착력에 힘입어 그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만 하면 오르막을 신통하게 오를 수 있게 된다. 이것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신통한 일머리 중 하나이다.

물살이 센 개울을 건널 땐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

그리고..

짐 가진 사람을 돕는 옳은 방법은
때로는 덜어주는 것보다 더해주는 것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1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비싼 재료의 화폐(양화)와 싼 재료의 화폐(악화)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유통되면 양화는 사라지고 악화만이 통용된다는 말이다. 
이를 그레샴의 법칙(
Gresham's law)이라 부른다. 16세기 영국의 재무관 토마스 그레샴이 주장한 화폐유통의 법칙이다. 사람들은 실질 가치가 높은 좋은 돈 양화는 내놓지 않고 소장하고, 가치가 낮은 돈은 남에게 줄 때 사용하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 구슬따먹기를 해본 사람은 이 말을 확실히 이해한다. 내기를 하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구슬을 주고받게 된다. 이때 항상 가급적이면 헌 구슬을 내놓고 새 구슬은 가장 마지막까지 보유하고자 노력하기 마련이다. 이게 그레샴 법칙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다임(Dime) 은화가 유통되다가 화폐의 수요가 늘어 1965년에 동일한 다임의 구리로 만든 동화를 발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은화는 시중에서 사라져버리고 동화만이 유통되었다. 사람들이 은화는 은닉해두고 동화만으로 거래를 하였기 때문이다. 




#2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한 모임에서 회비가 잘 걷혀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누군가가 그 돈으로 금뱃지를 만들어 회원들이 부착하고 다니자는 제안을 하였다. 금뱃지가 회원으로서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높여줄 것으로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여 뱃지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꺼리가 생겼다. 비싼 금으로 만든 뱃지를 분실하면 큰 손해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좋은 대책이 나왔다. 금색의 모조 뱃지를 개당 몇 천원에 만들어 한두 개씩 나누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뱃지는 아내가 어딘가에 잘 보관하고 있고, 나는 모조 뱃지만을 달고 다니고 있었다.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싼 모조 뱃지가 비싼 금뱃지를 쫒아낸 것이다.



#3 

주막집 개가 사나우면 술이 쉰다


송나라 사람 중에 술장사가 있었다. 

그릇을 매우 청결하게 하고, 팻말을 아주 길게 달아놓았지만, 

술이 쉬도록 팔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공의 개가 사나워, 사람들이 그릇을 들고 들어가 공의 술을 사려하면 
개가 나와 물어버립니다. 이것이 술이 시도록 팔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_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右 



주막집 문을 지키는 개가 사나우면 손님이 떨어지고, 손님이 없으니 술이 쉴 수밖에 없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부 담당자의 갑질이나 못된 행세가 협력사나 고객을 쫒는다. 우리는 자주 다니던 식당이나 이발관을 아주 작은 불만 때문에 발길을 쉽게 끊지 않았던가. 이러한 회사 내의 악화나 사나운 개는 다른 화폐가 아닌 대체불가능한 대상인 고객 등을 쫒아낸다는 점에서 화폐의 경우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

기업의 내부 사람들끼리에도 사나운 개가 있다. '퇴준생'이라는 신조어는 퇴사를 준비하고 있는 직장인이라는 뜻이다. 직장인은 항상 사표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퇴사자들의 퇴사 이유를 분석해보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상관과의 부조화'로서 이직 사유의 40% 이상을 점한다. 나도 젊을 때 몇 번 직장을 옮겨본 경험이 있다. 모두 상관 때문이었다.
이처럼 기업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사나운 개가 설치고 다니면서 전도 유망한 젊은 인재들을 쫒아내고 있다. 물론 본인들은 자신이 사납다거나 자기 때문에 아까운 젊은이가 상처를 입고 떠났는지 모른다. 그저 요즘 애들의 얕은 참을성만 탓한다.

기업의 리더들이 기억하여야 할 말이 있다. 리더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을 말 잘듣는 부하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또 다른 리더로 키워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4

디지털 화폐는 악화인가 양화인가?


악화와 양화라는 말이 나온 김에, 요즘 뜨고 있는 디지털 화폐(암호화폐 혹은 가상화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디지털 화폐가 현재의 실물 화폐 시스템을 대체하여 과연 미래의 주류 통화로서 자리잡을 수 있는지 여부이다. 디지털화폐가 양화라면,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다른 악화에 밀려 통용화폐의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고, 악화라면 통용화폐의 안방 자리를 쟁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디지털 화폐는 현실의 물리세계가 아닌 오로지 가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며, 그것을 만드는 들어가는 비용은 제로이다. 그 가치는 전적으로 사람의 인식과 신뢰에 의해서만 유지되며, 그 경제적 의미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여 여러가지 고도의 기술로 제작된 지폐나 동전에 비하면 디지털 화폐는 명백히 악화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만약 실물 화폐와 디지털 화폐가 동시에 통용된다면 실물 화폐는 사람들의 소장물로 되어 유통에서 사라지고 디지털 화폐만이 통용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바로 디지털 화폐에 뛰어드는 것은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나와있는 디지털 화폐의 종류는 2천종이 넘는다. 그 중에 살아남는 것은 손꼽을 몇가지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2018. 3. 22>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