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習_아테나이칼럼/아버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8.08.11 똥장군
  2. 2018.07.23 풍수지탄(風樹之嘆)
  3. 2018.07.21 아버지에게서 배운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법 (1)
  4. 2017.07.28 아버지와 산소
  5. 2017.07.28 아버지의 돈을 훔친 적이 있었다.

똥장군


**
옛날 변소는 대소변을 구덩이에 그대로 가둬두었다가 양이 차면 퍼내야 하는 소위 푸세식이다. 양이 충분히 쌓이고 거름으로 쓸만큼 적절히 삭으면 푸어야 한다. 이를 '변소 친다'라고 한다. 우리집에는 나란히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거름으로 잘 삭히기 위해 교대로 썼던 듯하다. 

경상도에서 변소를 '통시'라 불렀다. '통시'는 변소나 화장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변소'는 뒷간 전체의 공간적 개념이 강하다면, '통시'는 똥통 구덩이의 의미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변소에 빠졌다'라는 말보다 '통시에 빠졌다'라는 말을 더 쉽게 썼으니까. 

어릴 때 변소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통시' 위에 평행하게 걸쳐둔 판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하는데, 애들에게는 아래의 깊고 넓은 구덩이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거기다 큰 아이들이 들려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와 같은 이야기까지 생각나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통시에 앉아야 할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생각나서 아래에서 종이 든 손이 올라오는 상상이 떠오른다. 그 통시에 가끔 구데기를 쫒던 닭이 빠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죽은 닭은 요리가 되어 밥상에 올라왔었다. 드물지만 아이들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백설기를 해서 돌린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놀란 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매우 효과적인 심리 요법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빠져 본적은 없는데 앞집 애가 가끔 빠졌다. 떡을 보면 '니 통시 빠졌재?'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가끔은 '떡 좀 먹고 싶다'라고 하며 놀리기도 했었다.


**
엄마의 다양한 교육 방법 중에 너무도 가혹하고 비가역적인 징계가 있었다. 내가 힘들게 모은 귀한 재산을 '통시'에 갖다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 내 재산이라고 해봐야 딱지나 구슬이고, 어떤 땐 빌려온 만화책이 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따먹기'를 잘했다. 한 번은 동네 아이들에게서 따온 종이로 접은 딱지가 비료 푸대로 두어 자루나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엄마는 그 모두를 통시에 갖다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때 경험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아는 사람을 알 것이다. 잘 뒤집어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을 갖도록 딱지를 정성스레 만드는 과정과 따먹기하는 동안의 그 혼신의 집중력과 인고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었다면, 엄마로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뒤에 또 한번 천붕지통(天崩之痛)경험하였다. 이제는 구슬이었다. 죽기살기로 따모아서 소머리 분유 깡통에 몇 통을 채웠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뒷뜰에다 용의주도하게 파뭍어두었는데, 그게 어떻게 들통이 난 것이다. 학교에 갔다오니 빈 깡통만 마당에 나동그라져 있고 구슬들은 통시 속에서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구슬들을 모으기까지의 노력을 생각하니 저 귀한 것들을 그냥 저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똥바가지로 들어내고 푸대에 담아 개울로 가져갔다. 헹구고 씻고 말려서 다시 썼다.

친구에게서 빌려온 만화책을 통시에 빠트렸을 때의 절망감과 그 뒤의 시련은 필설로 다 설명 못할 정도이다. 만화방에서 빌려온 것이니 책값을 돈으로 갚아야 한다. 그게 얼마였던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그 돈을 갚기 위해 나는 상당 기간을 처절하게 노력하여야 했다. 비닐하우스 철거할 때 나오는 폐비닐을 모아 고물상에 팔기도 하고, 뒷마당서 굴껍질(우리집은 조개무지와 가까워 땅을 파면 굴껍질이 많아 나왔다)을 캐서 양계장에 갖다 팔았다. 가끔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 삥땅하기도 하고..

**
대학 1학년 때 집을 새로 지었다. 그 전의 초가집을 헐고 슬라브 구조의 양옥집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새 집에서는 집 본채에 화장실이 있기를 희망헀다. 부산의 친구집에서 본 수세식 화장실이 무척 부러웠다. 아버지에게 강하게 요청을 하고 건축업자도 설계에서 그런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집으로 화장실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여전히 재래식으로 다만 좀더 깔끔해진 구조로 지어졌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밥 먹는 곳 가까이에 변소가 있는 그런 불결한 구조를 허용할 수 없고, 아까운 거름을 하수구에 내버리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셨다.
화장실이 승격되어 본채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된 때는 결혼 10주년쯤 되었을 때 새 집을 지으면서였다.



**
통시를 칠 때에는 곰삭은 거름을 똥장군에 퍼담는다. 그러고는 자전거나 수레에 싣고 논과 밭으로 실어 날라야 한다. 고등학교 때 쯤부터 그 똥장군 나르기 작업은 나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는 굳이 그 곤란한 일을 다른 일꾼들 제쳐놓고 내게 맡기셨다. 이송 수단은 주로 짐자전거였다. 

똥장군은 와인발효용 오크통과 구조가 비슷하다. 내부의 공간을 두고 나무판재를 통형상으로 둘러가며 치밀하게 짜맞추고 대나무 테두리로 견고히 둘러 고정한 구조이다. 나무판재들 사이의 틈새는 아교로 때운다. 아무래도 오래 쓰면 틈새가 벌어져 조금씩 새기도 하고, 많이 낡으면 길이방향의 양단을 막고 있는 마감 판재마저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 똥장군을 나르는 일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나다니며 냄새로 동네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미안함이 있으니 신속히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그러니 새 신부가 시댁의 신주를 모시듯 조심하면서 빨리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내용물은 액체가 아닌가. 무게도 상당하다. 잘은 몰라도 40~50kg은 족히 나가지 싶다. 워낙 조심해서 다녀서인지, 먹을 것을 싣고 다니다 엎어본 적은 있어도 똥장군을 엎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똥장군은 정말 더러운 것이기에 오히려 진정으로 신주 모시듯 귀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가 그 위태로운 일을 굳이 내게 시키셨던 깊은 뜻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살아 오면서 그런 경험을 적잖이 했다. 똥장군과 같은 사람, 똥장군과 같은 일거리..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일일수록 혼신의 정성을 다하여야 더 큰 후회꺼리를 만들지 않는 법이다.

**
똥장군 나르기의 정작 곤란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건 사람들의 관심이다. 똥장군에서 나는 냄새와 불결함은 내가 구경꺼리가 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논으로 가려면 동네 웃깍단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그게 동네 사람들에게는 희안한 볼꺼리였다. 그 중에는 똥장군 나르는 내 모습을 가급적이면 보이고 싶지 않을 여학생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당시에 나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그 귀한 대학생이 똥장군을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게 구경꺼리가 될만도 했지 싶다. 동네 아지매들은 나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외동 양반 참말로 얄궂고 별나시재. 우째 저 귀한 아들을 세상에 저런 일을 시키실까?. 일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판검사 되시면 나중에 똥장군 판검사라 놀림 당할낀데' 등등..

아버지는 왜 똥장군 나르기를 내게 맡기셨을까. 물론 농가에서는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 누구든지 걸리는 대로 일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게 농가 가장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똥장군이다. 집에는 항상 일을 도와주러오는 일꾼들이 몇 있었으니 그들에게 시킬 수 있었을 거다. 그러면 한창 때의 아들 체면이 좀 덜 망가졌을텐데.

가만히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응당 그러실 만도 하다. 아버지는 일꾼들과 함께 일을 해도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남을 시키지 않고 직접 하셨다. 심지어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집 울타리 나무의 가지를 칠 때, 불러온 일꾼들은 아래에 떨어진 가치를 치우는 일을 하게 하고 손수 나무 위에 올라가셔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셨다. 내가 보고 기겁을 해서 교대하긴 하셨지만, 위험하거나 더러운 일은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시다. 똥장군 나르기도 그 일이 워낙 궃은 일이고, 일꾼들도 동네에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으니, 그들도 동네 한복판을 다닐 때 나름의 체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남이 아닌 아들이 똥장군을 다루는 게 너무도 지당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가 나의 얄팍한 재주를 가벼이 자랑하고 대학생입네하고 거들먹대며 조금씩 교만해지는 모습이 아버지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라고 항상 가르치셨다. 나의 경박한 교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명백히 반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머리 꼭지로 올라가는 나의 교만을 어떻게든 제대로 다잡아 경계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똥장군으로 교만을 억눌러주셨고, 그 덕분에 세월이 상당히 지나고 나서도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남달리 기특한 대학생 청년이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끝)



##  덧붙임말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논두렁이나 잔디밭에서 다른 풀에 비해 눈에 드러나게 자란 풀은 필시 잘려나가기 마련이다. 사람도 제가 똑똑하다고 교만하여 남의 눈에 드러나면 시기를 받아서나 조직의 건강을 위해 그것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
    원래는 '범을 청치 말고 갓을 짓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릴 땐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좀 자라서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갓'은 작은 산 혹은 숲을 의미한다. 범(호랑이)은 오라고 청한다고 해서 오는 동물이 아니다. 숲이 짙으면 작은 동물과 큰 동물이 모이게 되고, 그러면 범은 먹이가 있는 그 숲으로 저절로 오게 되어있다. 그러니 내가 나의 숲 즉 덕을 충분히 쌓으면 사람들은 내가 굳이 오라고 청하지 않더라도 내게 몰려든다는 가르침이다. 도리불언 하자성혜(蹊, 복숭아와 자두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길이 저절로 난다)와 같은 의미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는 고요하려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은 봉양하려 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네

往而不可追者年也(왕이불가추자년야)

가고나면 쫓을 수 없는 게 세월이고

去而不見者親也(거이불견자친야)

가시면 다시 볼 수 없는 게 어버이이네
_ 한시외전(韓詩外傳)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아버지에게서 배운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법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에 지게를 져야할 일이 많았다. 
지게는 옛날 농가의 필수적인 수송수단이었다. 오로지 사람의 어깨에 의존하여 물건을 이동시켜야 하는데, 힘과 경험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쌀가마를 서너가마씩 쉽게 지거나 자기 키의 몇 배 되는 부피의 땔감을 지고 좁은 논두렁을 태연히 걸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좀 몸에 익으면 사람의 힘으로 짐을 옮기는 데에는 이만큼 효율적인 도구도 없을 것 같다.

지게짐을 질 때 가장 힘든 것은 세워둔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과정이다. 일단 일어설 수만 있다면, 짐이 웬만큼 무거워도 지게가 등에 밀착되어 있어 발걸음을 떼고 걷을 수 있다. 지게 작대기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기도 하지만 정작 무거운 짐은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그 해 아버지는 양파 농사를 크게 하셨다. 논에 뽑아논 엄청난 양의 양파를 도로에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지게를 져보게 되었다. 가벼운 짐을 지고 다닌 경험이야 많았었지만, 제대로 일답게 짐을 져본 일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바지게(지게 위에 얹혀 짐을 담는 소쿠리 같은 물건)에 남들만큼 양파 다발을 얹어 담기까지는 했는데,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다.
짐이 무거우니 허리를 굽혀서 일어나야 하는데, 허리를 굽히면 짐이 머리를 넘어 앞으로 쏟아지고,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다리에 힘을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오셔서 도와주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도와주신 방법은 너무도 신통했다. 그 버거운 짐을 거짓말같이 쉽게 지고 일어날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그저 아버지는 나에게 뒤로 마구 뻗대라고 하시고는 짐을 진 내 뒤에서 지게를 앞쪽으로 사정없이 앞으로 미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뒤에서 미는 힘에 대항하여 뒤쪽으로 힘껏 뻗대야 했고, 그러자 믿기 힘들 정도로 금세 일어서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을 기억한다.
도와 주는 사람은 들어주는 게 아니라 밀어줘야 하는 거다.

그건 바로 기초 물리에서 배운 합력의 원리이다. 앞에서 뒤로 뻗대는 힘(F1)과 뒤에서 미는 힘(F2)이 상호 작용을 하여 상향의 합력(FR)을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시도해보았다. 내가 도움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해보았지만, 아버님와 함께 하던 것처럼 그렇게 원만히 잘 되지가 않았다. 그건 상대에 대한 강한 믿음과 이 작용의 효과에 대한 믿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다부지게 서로 함께 힘을 써야만 하는데, 어느 한 한 쪽에라도 믿음이 부족하면 충분히 힘을 쓰지 못하여 상승 방향의 합력이 충분히 발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주고자 때는 통상 그 사람이 힘을 쓰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힘을 더해줌으로써 짐을 덜어준다. 물건을 들 때는 드는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는 나아가는 순방향으로 힘을 보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지게를 지고 일어나게 돕는 방법은 오히려 그 반대로 역방향의 힘을 가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사실 짐을 지고 일어서는 힘의 거의 대부분은 짐을 지는 당사자에게서 나온다. 도와주는 사람의 역할은 짐지는 사람이 일어설 때 뒤로 밀리지 않도록 역방향의 힘으로 뒤에서 밀어 받쳐주는 것이다.

사람의 성장을 도울 때도 지게짐 돕는 것과 다르지 않다. 쉽게 일어나도록 짐을 덜어주는 것보다, 자신의 성장 반발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거스르는 힘을 가해주는 것이 제대로 이끌어주는 방법이다.  


짐수레를 끌고 오르막을 오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은 짐을 실고 얕은 언덕을 오를 때는 그저 뒤에서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수레의 짐이 많고 경사가 급한 언덕을 오를 때는 밀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더 방해가 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밀어주는 것보다 앞의 운전자의 손잡이에 큰 부하를 가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도움 방법이다. 그래서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짐수레를 앞으로 밀지 말고 짐수레의 뒷단을 위로 들어 올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운전자는 지면과의 강한 밀착력에 힘입어 그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만 하면 오르막을 신통하게 오를 수 있게 된다. 이것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신통한 일머리 중 하나이다.

물살이 센 개울을 건널 땐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

그리고..

짐 가진 사람을 돕는 옳은 방법은
때로는 덜어주는 것보다 더해주는 것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아버지와 산소


말 그대로 온 삭신이 쑤신다.

그저께 아버지 호출로 산소의 잡초를 제거하느라 하루를 사역하였더니 그 후유증이다. 평소 안하던 노동에 안쓰던 근육을 썼으니 편할 턱이 없다. 앉아도 누워도 도통 편하질 않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괜찮으시단다. 함께 일한 90세 노인보다 못한 내가 부끄럽다.

아버지의 산소관리에 대한 집착은 남다르시다.
어머니 말씀대로 산소 잔디를 그야말로 공단 같이 가꾸신다. 15~6년 전에 내가 충청도 웅천에까지 가서 석물을 해와 모든 산소를 일괄적으로 정비하면서, 그 때 잔디를 공들여 깔았었는데.. 그 후로 잡초 하나 없이 유지되어 왔었다. 그렇게 유지된 건 순전히 아버지의 까탈스런 관리 덕이다.

산소에 가보니 잡초가 적잖이 나 있다. 잎넓은 풀들은 시들어있고 군데군데 마른 풀더미가 있는 걸 보니 다녀가신지 1주일도 안된 거 같다. 여쭤보니 손수 제초제를 치셨단다. 분무기를 손수 메고 오셔서.. ㅠㅠ.. 집에서 거리가 족히 2키로는 될 텐데 아마도 자전거에 싣고 오셨나 보다. 자전거를 타고 오시지는 못하셨을테니 짐을 싣고 그냥 끌고 오셨을 거다. 산으로 오르는 길도 응당 10번 이상은 멈추고 숨을 고르셨겠지.

감히 뭐라 어찌 해볼 수 없는 아버지의 이런 사명감과 지극 정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진정 조상의 음덕에 대한 신념이 이토록 투철하신 걸까. 아니면 이 성실치 못한 아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무리는 하시는 걸까. 모르긴 해도 반세기 이상을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아버지의 정성은 가히 종교적이다.

내가 물려받으면 아버지처럼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걸 알고 계시기는 할텐데.. 이 미덥지 못한 이 아들에게 어찌 물려주려 하시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애가 타고 마음이 바쁘실 것이다. 

그럼에도 항상 열심히 설명해주신다.
'황새배기(억새 종류)는 뿌리가 깊고 넓어서 뿌리채 제거가 안된다. 잎사귀를 기울여 근사미(제초제 일종)에 담그면 뿌리까지 죽일 수 있다.'
'왕포아풀처럼 씨번식이 강한 것은 수시로 한달에 두어번 와서 뽑아주는 방법 밖에 없다. 조금만 때를 놓치면 자칫 온통 그 잡초들 천지가 될 수 있다.' 등..

내가 보기엔 모두 산소를 푸르게 덮어주고 있는 푸른 풀인데.. 꼭
그렇게 인종 차별 아니 초종 차별을 해야할까 싶다. 인간의 욕심이 죄없는 풀을 박해하고 있지나 않나 생각하면서도.. 초종 차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다 한 가지 가르침을 주신다.
"강한 놈이 사실은 가장 약한 기라. 황새배기는 뿌리가 질기고 잘 죽지 않지만 웃자라서 드러나기 때문에 반드시 제거될 수밖에 없는 기라. 모난 돌이 정 맞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다. 씰데 없이 웃자라면 배기지 못하는 법이다."

그나저나 걱정은 걱정이다. 말없이 일은 했지만, 속으로는 머잖아 내 손으로 산소를 정리해야 할 것이라는 불경스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대의 아디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지도 모르니..

(2017. 4. 23)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

아버지의 돈을 훔친 적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70년대 초반인 당시에는 용돈이라는 것을 주고받고 할 그런 형편들이 아니었다. 특히 아버지는 주변에서 누구나 인정해줄 정도로 정말 야물게 안 쓰고 안 입고 모아서 식구들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을 일구신 분이다. 그래서 적어도 경제권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 오로지 쥐고 계셨다.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식구는 돈을 써야 할 때마다 매번 힘들게 아버지를 설득하여야 했다. 그런 분에게 용돈이라는 말은 손톱도 들어가지 않을 턱도 없는 말이다.

우리 논에서 나온 비닐 등 폐 농자재를 고물상에 팔기도 해서 어느 정도 푼돈을 쓰기도 했지만, 중학교를 들어가 무협지와 만화에 재미를 붙이면서 턱없이 부족한 용돈에 허덕이고 있었다.


안방에는 아버지의 궤짝이 있었다. 가로 3자 높이 2자 정도 크기에 한 때는 자개 장식이 있었을 것 같은 낡은 옻칠 궤짝으로, 집안일에 관련되는 문서들과 돈을 보관해두는 곳이다. 당시에는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았으니, 그 궤짝이 우리 집의 금고인 셈이다. 이 궤짝에는 주먹만한 다이얼 자물쇠가 달려있는데, 전후로 왔다갔다 돌리며 번호를 맞추는 것이라 그 비밀번호는 알아내질 못했다. 그런데 문짝이 경첩에 의해 열리는데, 이 경첩이 낡아서 간당간당하는 것이다. 그 문짝 틈새 사이로 납작한 드라이버를 넣어 슬쩍 제치니 경첩이 떨어지며 문짝이 열린다.

지폐다발이 눈에 보인다. 아마 천 원짜리였겠지. 거기서 한 장을 빼냈다. 그리고 다시 문짝을 밀어 넣으니 별 표시가 남지 않고 원상복구가 되었다.

난 그 돈으로 상당 기간 적어도 몇 달을 정말 알차게 풍족히(?) 썼다. 가방 한쪽을 무협지로 가득 채워서 빌려오면 밤새 읽고 아침에 학교가면서 반납하고, 저녁에는 또 빌려오고.. 그러다 그 돈이 떨어지자 다시 범행을 저질러야 할 운명의 때가 온 것이다.


거사하기로 마음먹은 날. 주위를 나름대로 살펴본 후 드라이버를 경첩에 밀어 넣고 문짝을 여는 순간, 우찌 이런 일이..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셨다. 어머니도 뒤이어서..

온 세상이 노랗게 변한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질지, 벼락이 칠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바닥만 보고 멍청히 서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원 같은 짧은 침묵이 지나고, 결국 어머니가 입을 여신다. “야~야~ 니가 와이라노. 나가봐라.”그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침묵, 그것은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무서운 질책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을 더 하지 않았다.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 애들에 대한 폭력은 일상이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에게든 전혀 폭력을 쓰지 않으셨다. 아니 단 한번 있다. 고양이 힘도 빌려야 한다는 그 바쁜 모심기철에 무엇 때문인지 옆에 졸졸 따라다니며 부아를 채운 적이 있었다. 그때 한참을 참고 견디시다가 참다못해 내 귀퉁배기를 한 대 올리셨다. 그게 유일한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의 추억이다.

당시 우리 동네의 이웃들은 다들 형편이 딱했다. 먹고살기 어려우면 가정 폭력도 많은 법이니, 주위 또래 동무들은 그 부모들에게 늘상 맞고 자랐다. 그들이 맞아야 되는 주된 이유는 거짓말, 도둑질, 싸움 등과 같이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나쁜 짓이다. 그런 교화를 충분히 많이 받고 자란 그 친구들은 대체로 좋지 않은 길로 빠져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의 어른으로 성장했다.


가끔 그 사건을 가만히 생각한다.

그때 아버지는 왜 아무 말도 안하셨을까? 자식에 대한 교육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되는 일인데. 나는 상당한 벌을 에상하고 있었었다. 어떤 벌도 달게 받았어야 한다.

내 아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는 둥 최소한의 잔소리라도 좀 했을 거 같은데.

휘어진 나무를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고, 다른 아버지들처럼 따끔하게 매를 들어 벌을 주었다면, 나는 더 착하고 더 훌륭한 인간이 되었을까? 내 볼촉맞은 성격을 생각한다면 필경 더 좋아지지는 않았을 거 같기는 하다.


아버지에게 감사하여야 할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고마움 중에 이 일이 내게는 가장 고마운 일이다. 돈을 훔친 짓을 그냥 말없이 지나쳐주신 것이 그렇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셨고, ‘용서’의 방법은 아무 말도 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침묵에 의한 용서”를 택하신 것이다.

사실 그 뒤로도 용서받기 힘든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용서를 대신하셨다. 오히려 작은 잘못은 짜증이 날 정도로 반복해서 질책을 하셨지만, 정작 큰 잘못에는 아무 말없이 지나치셨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인간의 언어도 규정하게 되면, 그 시점에서부터 언어에 의해 구속되게 된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아버지가 내가 한 짓으로 벌을 주거나 교육하고자 하는 순간, 나는 그 때부터 명백히 돈을 훔친 도둑놈이 된다. 그리고 내게는 그리고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는 도둑질, 도둑놈이라는 관념이 영원히 각인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도둑의 개념이 내게 규정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도둑’이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공(子貢)이 공자에서 “평생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其恕乎].”(논어 위령공편)라고 말하였다. ‘서(恕)’는 ‘용서’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40중반의 그 젊은 나이에 공자의 깨달음을 몸으로 실천하신 것이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어떤 논리나 지식으로 용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그저 본능적으로 침묵하고 잊어주도록 행동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용서는 진정 인간이 신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용서는 결국 사랑이다.

사랑 없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용서 없는 사랑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다.







Posted by 허성원 변리사